장갑: 생(生)의 기록

김미진(예술의전당 전시예술감독, 홍익대 미술대학원 부교수)



“장갑작가”로 알려진 정경연은 30 여 년 간 장갑을 주제로 섬유, 회화 , 판화 , 조각, 설치, 비디오 등의 다양한 조형작업을 해 오고 있다. 정경연의 미국유학 후 81년도 귀국 전에서 보여주었던 끝자락 밑 부분을 염료로 물들인 한지를 못에 걸어놓은 설치작업 <무제 81-8>은 그 당시 전통장르가 대부분이었던 한국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섬유를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위로서의 종이를 겹겹이 걸쳐놓아 선, 면, 덩어리를 부드럽고 유동적인 생성의 형태로 만들어 가면서 공간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변형시킨 작업이었다. 노동력이 요구되는 신체행위와 인내라는 심리상태의 시간성을 요하는 이 작업은 완성되고 결정된 형태로 전달되기 보다는 질료자체의 존재성이 강하게 드러나면서 주변공간과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생명력을 가진 유기적 조각설치였다. 재료가 존재의 개체역할을 하며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있는 이 작업의 연장선상으로 작가는 더욱 실존적이며 구체적인 재료로서 일상 속에서의 기성제품인 무명 장갑을 발견하였고 평생 작가의 작업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섬유의 날실과 씨실의 가장 기본 패턴을 이루고 있는 무명 장갑은 수공예, 서민, 노동을 상징한다. 손의 형태는 다른 사람들과 처음으로 관계하는 소통의 도구를 의미한다. 정경연은 장갑으로 나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대상, 나와 우주, 타자와 타자-라는 인간의 삶(인생)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장갑은 화려한 물질의 옷을 입고 있거나 무채색으로 내적이며 본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장갑은 재료로서의 조형적, 철학적 구조 안의 또 하나의 종속된 창조자로서 기호역할을 한다. 사회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류 안에 종속된 기본단위면서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인 ‘나’를 장갑이란 개체에 대입한 것이다. 정경연은 확산과 스며들기, 음과 양, 하나와 반복, 중층과 늘임, 팽창과 수축이라는 이중적 대립구조의 표현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이것은 작가가 조화, 균형, 질서라는 세상의 희망적 가치를 간직한 선과 악, 자연과 문명, 우주와 인간, 이성과 감성의 인간 내부와 외부에 속한 이중적인 면의 탐구다.

 

정경연의 작업은 하나의 형태 안에서나 반복된 형태에서 창조의 시작과 종말을 함께 담고 있다. 그것은 크게 우주의 주기적인 창조의 내제된 법칙 안에 있다. 단 하나의 삶을 가진 개체인 나와 우리는 다름이 없이 같이 내제된 세계 안의 존재법칙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Untitled 04, 2004년作>은 손바닥 중앙에 구멍나 설치된 장갑으로 죽음으로 돌아가는 존재자체의 근원적인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 <Harmony installation video art & mixed media 2007~2008>처럼 집단으로 표현된 것은 인류 전체로서의 함께 하는 삶을 보여준다. 직육면체의 거대한 장갑집단은 한정된 문화와 환경을 가진 삶에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만남 그리고 관계 안에서의 인간사라는 대서사시를 표현하는 대형스케일 작업에서 창조하는 예술가로서의 카리스마가 보인다.


정경연은 20여 년간 관계라는 주제를 가지고 매체자체의 조형적 변형과 존재의 형태를 탐구하며 실험을 해왔다면 최근 2006년부터는 중견작가로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확인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어울림>의, <삶의 창조>시리즈는 삶에 대한 확인의 즉물적 작업으로 하나씩 드러나는 장갑의 실체와 그를 둘러싸고 함께하는 타자, 외부간의 관계의 명확한 형태로 표현한 작업들이다. 개체의 독립성과 관계의 조화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 작업들은 치열하게 50여 년 간 살아온 인생과 예술적 경험을 통해 나온 관조로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인간의 운명을 보여준다.


가장 최근 제작된 <블랙홀, 2008년作>시리즈는 조금 더 철학적인 작업으로 인간의식에 의한 무한한 가능성의 열림을 안(내부)과 밖(외부)의 블랙홀로 정착시킨 것이다. 색채는 검은 색으로 귀환되고 장갑들은 둥글게 겹쳐져 생성의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다. 화면 중심과 바깥에는 검은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심연의 블랙홀이며 외부세계의 블랙홀이다. 결국 우리는 외부와 내부로의 두 가지의 팽팽한 당김의 가운데에 있는 존재들이다. 

두 개의 블랙홀은 정신과 물질이 될 수가 있고 내면과 외부, 우주와 땅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문명이 사회가 발달해도 존재는 원으로 이 원초적 굴레를 맴돌고 있다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인간은 내부와 외부세계의 관계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평화롭고 안정된다. 작품 <08-1>에서 보면 블랙홀에서 생성된 존재는 매우 정적이며 서서히 외부세계에 흡입된다. 반면 <8-19>는 원초적 에너지를 가지며 외부세계자체를 물들이고 있다. 이 시리즈는 장갑패턴의 움직임으로 내부와 외부의 블랙홀로 빨려가면서 나타나게 되는 서로 다른 에너지의 울림의 양태를 보여 준다. 원래 처음 창조 되었을 때는 순수개체였던 존재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회, 문화, 환경에 따라 아주 다른 모든 방향으로 충돌하는 개체로 변할 수 있다. 

정경연이 블랙홀 이전에 했던 작업은 다양한 실험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었다면 <블랙홀>시리즈는 이미 생성을 겪고 많은 실험을 거쳐 그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성숙한 작가자신과 포스트모던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잠재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앙에 보이는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눈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의 확신과 보이지 않은 내면의 불확신 그리고 그것조차 규명할 수 없는 이 시대의 현상까지도 잡아당기는 생성의 법칙이다. 각각의 블랙홀에 의해 끌어당겨진 관계의 형태는 나름의 참여법칙이 있지만 자연과 우주의 생성법칙을 깨달은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를 이 작업을 통해 사고하게 된다. 정경연은 예술의 본질이라는 성소(블랙홀)를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순례자처럼 삶과 작업에서 꾸준히 세상의 법칙을 탐구하며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다. 


언젠가는 생사의 법칙을 깨달은 완성자로서 존재의 모습을 삶과 예술로서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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