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연의 작품은 공예인가 조각인가 하는 물음은 그의 작가적 위상을 가늠하는 주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공예이기도 하고 조각이기도 하다는, 즉 어느 것에도 해당된다는 애매한 표현은 자칫 공예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다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가 처음 등단했을 때 그의 작품을 어떻게 분류해야하는가가 한동안 논란되었었다. 소재(재질)자체만을 두고 보았을 때 이는 분명 섬유공예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의 형태와 비기능적 측면을 두고 볼 때는 조각 또는 입체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섬유란 천을 기본재질로 하는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영역을 이름이다. 그런데, 정경연의 작품은 섬유 원래의 목적성으로서의 기능을 벗어나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고자 한 점에서 공예라는 영역을 부단히 뛰어넘고 있다.
다소 보수적인 섬유예술 측에서는 이것은 섬유공예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가하면, 진취적인 안목에선 소프트스캅쳐가 새로운 장르로 떠오르는 시대적 추세에 부응해서 우리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건으로 가늠하기도 하였다. 평론가 이일은 더 나아가 “회화적이기도 하고 조각적이자 동시에 오브제로서의 물성과 텍스처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작품, ˙˙˙˙다의적 성격”의 작품으로 평가한바 있다. 지금도 그의 위치는 어중간하다기보다 폭넓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학에선 섬유예술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로서 적을 두고 있지만 그의 활동영역은 섬유와 아울러 회화, 조각전 등에 미치고 있다. 주요한 현대미술의 초대전에 그가 초대되는 것은 섬유예술가로서가 아니라 한사람의 현대조형작가로서이다. 이점에서 확실히 그는 섬유예술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섬유예술의 현대조형으로서의 가능성을 더 넓힌 작가로서의 위치에 서있는 셈이다. 그는 질료로서의 섬유를 다루는 한편 내용으로서의 소재는 장갑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깐 질료로서의 소재와 내용으로서의 소재가 묘하게 일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로 섬유가 아닌 테라코타, 브론즈 등 매체로 장갑이란 소재를 다루는 예외도 없지 않지만 누구나 정경연하면 연상케되는 것은 소재(질료)로서의 장갑과 내용으로서의 장갑을 다루는 조형작가로 알고 있다. 어느 일정한 소재에 집착한다는 의미에서 <장갑의 작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는 등단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갑이란 소재를 다루어오고 있는 편이며 지금에 와선 장갑과 그의 작가적 위상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장갑은 그의 분신과 같은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장갑이란 무엇인가, 손에 끼는 기물이다. 추위를 막기 위한 기능을 지니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손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물이다. 인간의 신체를 보호하는 갖가지 기물이 존재하지만 장갑만큼 신체에 밀착된 것도 드물 것이다. 그리기에 가장 신체적인, 또는 가장 인간적인 체취를 지닌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갑은 특별한 의미와 상징으로서 구현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경외하는 어른들에게 손으로 뜬 장갑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다. 정경연이 장갑을 소재로 선택하게 된 동기도 어머니가 유학가 있는 딸에게 보낸 장갑을 받고서였다고 한다. 애틋한 모정이 게재되어 있는 장갑은 단순한 기물로서의 장갑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한 실존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메신저로 표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갑은 다른 신체를 감싸는 기물보다도 신체의 연장으로서 짙은 인간적 감정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특별히 장갑에 집착하게 된것도 어쩌면 장갑이 지닌 의인화의 뛰어남에 기인된 것이 아닌가본다. 특히 이 의인화는 장갑이 군집을 이루면서 자아내는 특유의 해학에서 그 정수를 목격하게 된다. 누구든지, 우리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장갑이란 기물이 서로 군집을 이루면서 자아내는 특유의 표정에 절로 웃음을 머금을 것이다. 어쩌면 장갑들이 서로 엮어지면서 이토록 유머러스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단순히 평범한 장갑이란 대상을 소재화했다는데서가 아니라 장갑이 지닌 특유의 신체성이 더욱 인간화됨으로써 자아내는 놀라온 정감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장갑들은 어떤 질서에 의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번식의 논리로서의 생명현상을 구현시키는가 하면, 종두처럼 또는 버섯처럼 밖으로 빚어져 나옴으로써 마치 아우성 치는 존재의 맹렬한 자기주장을 듣는 느낌도 갖게 한다. 거대한 탑의 형상으로 쌓아 올려지는가 하면 자라나는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나기도 한다. 총총하게 얽혀 거대한 질서의 구조물로, 때로는 무질서하게 공간에 허우적되는 생명체로 구현되기도 한다. 염색된 부분과 염색되지 않은 부분의 컴비네이션은 변화와 생성의 시각적 변주를 연주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일이 언급했듯이 “작품의 실체너머의 무한 번식과도 같은 시각적 판타지아의 세계”로 전개된다.
정경연은 장갑이란 소재를 일관하면서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한다. 흔히 자기세계에 빠져 안주해버리는 타입의 작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래의 변화에서 두드러진 것은 평면화와 풍부한 색채의 원용이다. 입체에서 평면에로의 회귀는 자연 풍부한 색채의 동반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주로 장갑이란 소재가 지니는 신체적인 표정과 그것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구조적 조형성에서는 엿 볼수 없는, 어쩌면 더욱 간결하면서도 깊이를 추구하는 변화의 내역이 아닌가 본다. 화사하면서도 깊은 내면에로의 침잠은 작가로서의 더욱 풍요로운 완숙에로의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오광수
정경연의 작품은 공예인가 조각인가 하는 물음은 그의 작가적 위상을 가늠하는 주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공예이기도 하고 조각이기도 하다는, 즉 어느 것에도 해당된다는 애매한 표현은 자칫 공예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다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가 처음 등단했을 때 그의 작품을 어떻게 분류해야하는가가 한동안 논란되었었다. 소재(재질)자체만을 두고 보았을 때 이는 분명 섬유공예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의 형태와 비기능적 측면을 두고 볼 때는 조각 또는 입체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섬유란 천을 기본재질로 하는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영역을 이름이다. 그런데, 정경연의 작품은 섬유 원래의 목적성으로서의 기능을 벗어나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고자 한 점에서 공예라는 영역을 부단히 뛰어넘고 있다.
다소 보수적인 섬유예술 측에서는 이것은 섬유공예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가하면, 진취적인 안목에선 소프트스캅쳐가 새로운 장르로 떠오르는 시대적 추세에 부응해서 우리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건으로 가늠하기도 하였다. 평론가 이일은 더 나아가 “회화적이기도 하고 조각적이자 동시에 오브제로서의 물성과 텍스처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작품, ˙˙˙˙다의적 성격”의 작품으로 평가한바 있다. 지금도 그의 위치는 어중간하다기보다 폭넓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학에선 섬유예술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로서 적을 두고 있지만 그의 활동영역은 섬유와 아울러 회화, 조각전 등에 미치고 있다. 주요한 현대미술의 초대전에 그가 초대되는 것은 섬유예술가로서가 아니라 한사람의 현대조형작가로서이다. 이점에서 확실히 그는 섬유예술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섬유예술의 현대조형으로서의 가능성을 더 넓힌 작가로서의 위치에 서있는 셈이다. 그는 질료로서의 섬유를 다루는 한편 내용으로서의 소재는 장갑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깐 질료로서의 소재와 내용으로서의 소재가 묘하게 일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로 섬유가 아닌 테라코타, 브론즈 등 매체로 장갑이란 소재를 다루는 예외도 없지 않지만 누구나 정경연하면 연상케되는 것은 소재(질료)로서의 장갑과 내용으로서의 장갑을 다루는 조형작가로 알고 있다. 어느 일정한 소재에 집착한다는 의미에서 <장갑의 작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는 등단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갑이란 소재를 다루어오고 있는 편이며 지금에 와선 장갑과 그의 작가적 위상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장갑은 그의 분신과 같은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장갑이란 무엇인가, 손에 끼는 기물이다. 추위를 막기 위한 기능을 지니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손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물이다. 인간의 신체를 보호하는 갖가지 기물이 존재하지만 장갑만큼 신체에 밀착된 것도 드물 것이다. 그리기에 가장 신체적인, 또는 가장 인간적인 체취를 지닌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갑은 특별한 의미와 상징으로서 구현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경외하는 어른들에게 손으로 뜬 장갑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다. 정경연이 장갑을 소재로 선택하게 된 동기도 어머니가 유학가 있는 딸에게 보낸 장갑을 받고서였다고 한다. 애틋한 모정이 게재되어 있는 장갑은 단순한 기물로서의 장갑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한 실존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메신저로 표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갑은 다른 신체를 감싸는 기물보다도 신체의 연장으로서 짙은 인간적 감정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특별히 장갑에 집착하게 된것도 어쩌면 장갑이 지닌 의인화의 뛰어남에 기인된 것이 아닌가본다. 특히 이 의인화는 장갑이 군집을 이루면서 자아내는 특유의 해학에서 그 정수를 목격하게 된다. 누구든지, 우리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장갑이란 기물이 서로 군집을 이루면서 자아내는 특유의 표정에 절로 웃음을 머금을 것이다. 어쩌면 장갑들이 서로 엮어지면서 이토록 유머러스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단순히 평범한 장갑이란 대상을 소재화했다는데서가 아니라 장갑이 지닌 특유의 신체성이 더욱 인간화됨으로써 자아내는 놀라온 정감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장갑들은 어떤 질서에 의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번식의 논리로서의 생명현상을 구현시키는가 하면, 종두처럼 또는 버섯처럼 밖으로 빚어져 나옴으로써 마치 아우성 치는 존재의 맹렬한 자기주장을 듣는 느낌도 갖게 한다. 거대한 탑의 형상으로 쌓아 올려지는가 하면 자라나는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나기도 한다. 총총하게 얽혀 거대한 질서의 구조물로, 때로는 무질서하게 공간에 허우적되는 생명체로 구현되기도 한다. 염색된 부분과 염색되지 않은 부분의 컴비네이션은 변화와 생성의 시각적 변주를 연주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일이 언급했듯이 “작품의 실체너머의 무한 번식과도 같은 시각적 판타지아의 세계”로 전개된다.
정경연은 장갑이란 소재를 일관하면서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한다. 흔히 자기세계에 빠져 안주해버리는 타입의 작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래의 변화에서 두드러진 것은 평면화와 풍부한 색채의 원용이다. 입체에서 평면에로의 회귀는 자연 풍부한 색채의 동반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주로 장갑이란 소재가 지니는 신체적인 표정과 그것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구조적 조형성에서는 엿 볼수 없는, 어쩌면 더욱 간결하면서도 깊이를 추구하는 변화의 내역이 아닌가 본다. 화사하면서도 깊은 내면에로의 침잠은 작가로서의 더욱 풍요로운 완숙에로의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오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