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연-실존으로서의 장갑

1. 정경연의 데뷔는 우리 미술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충격으로 장식되었다. 그의 데뷔전이 열린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 미술계에서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영역구획이 뚜렷한 편이었다. 회화, 조각을 순수미술로, 공예를 응용미술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정경연의 작품은 섬유공예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내용은 고식적인 분류개념을 타파한 순수한 작품을 지향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틀을 과감히 부수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것>(이일)이었다. 전시의 타이틀이 <섬유 조형전>이라는 점에서도 시사되듯이 그의 작품은 섬유공예가 아니라 섬유조형이었으며 이 경우 섬유는 단순한 매체일 뿐이고 결정체는 조형으로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섬유예술을 종래의 인습적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요, 혁명이었다. 공예측에서는 이건 섬유공예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틀에서 벗어나는데 대한 불안과 불평을 제기하였는가 하면, 순수미술 측에서는 섬유도 순수한 조형이 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기대가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기존의 공예계나 순수미술 측에 다같이 충격을 준 것이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이라는 고식적인 분류체계도 많이 수정되었다. 기능을 위주로 했던 응용미술이 순수조형을 지향하는 추세가 급속히 확산되었고 각 미술장르간의 영역 침투와 파괴라는 현상이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요한 화두로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정경연의 작업은 에폭 메이킹의 선두주자로서의 그것에 값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의 활동은 왕성하다는 표현에 걸맞게 90년대 초까지 거의 매년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이 같은 활동과 그 반향은 공예에서 조형으로라는 인식의 전환에 획기적인 것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의 작품 가운데는 염색한 종이를 길게 늘어뜨리거나 일정한 패턴에 따라 꼴라주 해간 것도 있지만, 정경연하면 떠오르는 것은 장갑을 매체로 한 작품이다. 작가에 따라 특정한 모티브나 매체가 작품의 총체로서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산을 중심 모티브로 일관한다고 해서 <산의 작가>니, 물방울이라는 특수한 현상에 매달려 있다고 해서 <물방울 작가>니 하는 닉네임이 그것이다. 정경연의 주 매체가 장갑임으로 해서 흔히 그를 <장갑의 작가>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8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갑을 매체로 하고 있으니 20년 가까이 한 소재에 집착하고 있는 셈이다. <장갑의 작가>란, 따라서 꾸준함과 특수한 영역의 소재화라는 두 가지 미덕을 아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장갑은 기성의 면장갑이다. 필요에 따라 손가락을 길게 뽑아내거나 비정상적인 크기로 확대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레디메이드로서의 장갑이다. 여기에다 부분적으로 염색을 가하고 이를 일정한 패턴에 따라 구성해 가는 것이 그의 작업의 내역이다. 어떻게 보면 소재 선택이나 구성의 방법이 대단히 심플한 편이다. 작품에 염색이라는 선택과 방법 면에서 가장 순수한 직물공예, 섬유공예에 속하지만 장갑이 지니는 고유한 물성과 특수한 텍스추어, 그리고 엮어나가는 구성의 패턴, 설치와 연출의 방법 면에서는 회화, 조각, 설치라는 미술 전 영역에 걸친 것이다. 회화적인 구성요소가 강조되는가하면 릴리프로서의 반입체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기도 한다. 독립된 덩어리로서의 조각이기도 하지만 몇 개의 입체적 단위가 어우러지면서 거대한 설치작품이 되기도 한다. 장갑은 애초의 단순한 소재로서 출발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얽힘으로서 소재의 한계를 벗어나 <시각적이자 촉각적이요, 객체적이자 구체적인>(무라다 케이노스케)사물이 된다. 개별적이면서 항상 전체를 지향하는 것이 구성적 패턴의 기본이다. 어떻게 보면, 정경연의 장갑 시리즈는 이 같은 구성의 패턴에서야말로 진정한 조형적 논리는 확인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장갑은 생활 속의 도구이다. 방한이나 노동판에서의 손의 보호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떤 도구보다도 신체성이 강한 도구이다. 의복보다도 더욱 신체성이 강한 것은 신체를 감싸는 부위와 도구가 거의 일치함에서 연유된다. 인체의 부위 가운데 가장 풍부한 표정을 지니는 것이 다름 아닌 손이고 보면 손에 꼭 끼이는 도구로서의 장갑 역시 손의 풍부한 표정을 대신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정경연의 장갑이 풍부한 해학성을 지니는 것도 손의 표정이 지니는 풍부한 동작의 개연성에 말미암는다.


인간의 내면적 기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신체의 부위는 얼굴과 손이라고 한다. 얼굴의 갖는 표현의 한계에 비한다면 손의 표정은 얼마나 풍부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예수와 열 두 제자의 내면적 심리의 변화를 손의 동작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의도 역시 손이 내면의 변화를 가장 민감히 전달하는 신체 부위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정경연의 장갑은 장갑이라는 도구의 한계를 지니지만 그 다양한 전개의 양상은 손이 지니는 변화의 속성을 적절히 조형으로 수렴함에서 기인된다고 보아야 한다.


정경연이 사용하는 소재로서의 장갑은 면장갑의 일정한 부위에 따라 농도를 달리한 염색이 가해진다. 장갑 속에는 솜 같은 물질을 넣어 마치 인간의 손이 끼워진 것 같은 신체성을 부여한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볼륨감은 손이 들어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장갑을 일정한 패턴의 논리에 따라 엮어 나간다. 손가락들이 안으로 감추면서 장갑의 바닥이 돌출되는 경우도 있고 손가락이 부분적으로 삐죽이 나와 마치 종유석의 돌기현상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부분적으로 가해진 염색의 부위가 일정하게 이어지면서 변화를 유도한다. 장갑 자체가 일정하게 반복되면서 무한히 증식되어가지만 동시에 부분적으로 염색된 부위로 인해 화면 전체는 염색되지 않은 순수한 면의 부위와 염색된 부위가 서로 엇물리면서 거대한 구성의 단위를 이루어 낸다. 이 같은 평면적 전개의 양식은 마치 패턴 페인팅을 대하는 것 같은 일정한 질서의 반복을 보인다. 그러나 접근해서 보면, 물질로서의 장갑의 속성과 그것의 연결에서 자아내는 표정의 다양함이 다분히 입체적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평면 위에 입체성이 부여된 부조(릴리프)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두고 <회화적(또는 2차원적)인가 하면 또한 조각적>(이 일)이라 한 것도 적절한 표현이다. 때로는 평면성이 강조되지만 때로는 입체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작품의 존재방식을 그만큼 열어주는 단초가 된다. 벽면에 부착되는 평면성이 강한 작품과 공간 속에 설치되는 입체성이 강한 작품들로 분류되지만 때로는 벽면과 공간에 연결된 작품도 등장하는가하면 순수한 입체로서의 조각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90년대에 오면서 테라코타, 브론즈를 도입한 일련의 작품은 이미 가벼운 조각(Soft Sculpture)이라는 섬유물에 의한 조각형식을 벗어나고 있다. 재료의 선택은 형식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테라코타, 브론즈에 의한 장갑 시리즈는 섬유조각의 연장이기는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이미 가벼운 조각의 범주를 탈각하여 무거운 조각으로서의 기존의 조각 범주에 가입된다. 섬유에서 보여 주었던 생성의 가변성이 테라코타, 브론즈에 오면서 이미 결정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에게서 매재의 확대는 단순한 새로운 질료의 체험을 넘어 공간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간파하게 한다. 그냥 조형작가?



3. 장갑은 가장 신체성이 강한 물질이자 동시에 가장 일상적인 도구이다. 너무 범상한 물체이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끄는 대상도 아니다. 더욱이나 정경연이 선택하고 있는 장갑은 노동판에나 막일을 할 때 사용되는 하잘 것 없는 소모적 대상에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들이 일정한 조형적 패턴에 의해 독특한 위상으로 재생되고 있다. 장갑으로서의 본래적 쓰임새를 떠나 장갑이 지니는 신체성의 복합적 심리상적 도구로서의 존재를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집적(集積)되고 증식되고 변용됨으로서 장갑이면서 동시에 장갑이 아닌 존재로서의 차원에 진입되고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단위로서의 장갑은 하잘 것 없는 존재이나 이들이 집적되어 거대한 덩어리를 이룰 때 놀라운 변신의 모습을 드러내 놓는다. 삐죽이 내밀고 있는 손가락들은 마치 해저식물의 돌기처럼 물결치는가 하면, 비비적거리면서 얽혀지는 몸통들은 아이들이 뒤엉켜 줄다리기라도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순응하면서 전체를 향해 진행되는 잔잔한 질서의 대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총총하게 돌기하는 손가락들의 집적으로 인해 거대한 아우성으로 바뀌기도 한다. 내재하는 욕망을 분출시키는 거대한 집단의 힘의 질서를 반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연상을 앞지르는 것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풍부한 해학성이다. 누구든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그것들이 기이하다든가 놀랍다던가 하는 감탄에 앞서 입가에 절로 미소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전시장에서 언제나 목격한 일인데 전시장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하나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전시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웃음의 물결로 채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은 보다 직접적이라 할 수 있다. 시각적이면서도 동시에 촉각적인 작품의 성향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기보다 오감으로 체감하기를 요하고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거리를 없애고 보는 사람과 보여 지는 대상이 일체화되기를 요하는 것이기도 한다. 또는 단순한 대상으로서 작품이기 보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보는 사람과 대등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대상이기보다 생명체로서의 실존적 요소가 강하다. 그런 만큼 작품은 대상으로서가 아닌 자립하는 존재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작가와 작품은 개별이자 일체로서 또 다른 삶을 구가하는 것이다.

Tel. 02-3486-5193     |     HP. 010-3622-0449     |    OFFICE.02-320-1225     |     Email : owon55@hanmail.net

COPYRIGHT 2019 ⓒ CHUNG, KYOUNG YEON . ALL RIGHT RESERVED.